1986.04.11 ~ 04.17 동덕미술관 정병관 <빛 공간 그리고 정적>

빛,420x160,한지에 채색,1986

빛 공간 그리고 정적 - 정병관

녹색, 청색 또는 흑색, 황금색 등의 거의 단색조로 그려진 평범한 강변이나 숲 풍경들은 고요하고 광활하며, 아참, 저녁 또는 한낮의 빛나는 광선으로 가득 차 있다. 한강 양수리의 아침풍경을 그린 ‘빛', 낙동강에 ‘을숙도' 그리고 ‘결'등의 풍경들이 그러하다.

색이라는 말보다 빛깔이라고 하는 말이 더 과학적이며, 김보희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도 더 적합한 것 같다. 색이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오직 빛에 의해서만 보여지는 것이며 광선이 충만하게 차있는 공간 속에서 느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록빛 나무들이 울창한 숲은 밝은 빛이 나무후면에서 비치는 것처럼 투명하다. 채색화에서 전통적으로 느껴지는 불투명성이 아니라, 팝 아트 그림 이후에 이른바 캔디 컬러라고 하는 투명하고 경쾌한 색조들이어서, 동양화 채색을 현대적 색채감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된다. 작품 ‘빛'에서 사용된 먹색 역시 광선이 가득 찬 먹색 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단색조의 화면들이 1970년대의 추상화들이 가진 단색성과 일치하며, 현대감각을 풍기는 화면들이다. 단색조는 원래 고요한 명상성이 지배적이어서, 어떻게 보면, 소음과 혼탁에 파묻힌 현대 도시인들이 조금 고요한 세계로 물러나서, 조용히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찾아내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게다가 무미한 색채 없는 세계가 아니라, 거기 물이 있고 산이 있으며, 끝없는 수평선까지 한없이 펼쳐진 잔잔한 강물과 나무들이 있다. 광활한 공간표현은 럽은 강물 뿐만이 아니라, 하늘 끝에 가느다란 한줄기 수평선 위에 언덕이나 섬 같은 풍경에서도 온다. 푸른 강가에 누런 갈대와 건너편 언덕, 금빛물결 끝에 푸른 섬 등으로 때로는 대조되는 색이 쓰여져서, 단색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작품 ‘밫'에서도 강 멀리 검은 섬의 먹색이 전체적인 부드러움을 힘있게 통제하는 구심점 같은 역할을 한다.

조용하고 청결 하며, 품위 있고 단순한 구도들이 풍경이나 인물에서 지배적이다. 여성적인 너무나 여성적인 티없는 청순함이 있다. 양식사적인 말을 쓴다면 고전주의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조용한 세계의 전재는 화가의 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표현한 것이 될 것이다. 바람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인간도 없고 새도 없으며, 오직 태고적부터 조용하고 이어온 잔잔한 물, 고요한 숲만이 거기 있다.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화가가 그렇게 있게 되기를 바라는 세계가 있는 것이다.

김보희는 필자가 수년이래 ‘겨울전'이라는 조교출신화가들 모임의 전람회에서 기타 공모전 등에서 주의 깊게 좋은 작가라고 보아온 화가 중에 한 사람이다. 그 특이한 화풍에, 그 감명을 주는 단색조의 공간표현이 눈에 띄었던 화가이다. 동양화 특유의 재료나 색을 사용하고 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필자가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표현된 세계는 현대감각이 충만한 그것이기 때문에 공감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대에서 배출되는 훌륭한 화가 중에 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나아가서 한국 여성화가 중에 빛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