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09 ~ 10.30 제주현대미술관 《the Days》


오롯이 사적인 시간

이미경(제주현대미술관 학예사)

 

전시를 찾는 사람들

주시하는 대상을 그림에 담는 작가와 그 그림을 보기 위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하는 관객. 이들의 행보에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행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각자의 대면이 계속된다는 것, 그 지속됨은 각 주체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에 그저 눈의 망막에 특정 이미지를 담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의 제주도가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공항 주변의 도심지를 지나서 시외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푸르른 자연의 면면을 마음껏 볼 수 있다. 제주도 서쪽의 저지리 마을에 위치한 제주현대미술관 또한 여름이 되면 해가 길어진 만큼 주변의 곶자왈 숲이 뿜어내는 기분 좋은 자연의 생기(生氣)를 부족함 없이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김보희 개인전 《the Days》가 시작된 제주현대미술관의 올해 여름은 그 어느 때보다 활력이 가득했다. 많은 관객들이 전시를 찾았고, 전시공간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 의한 생기는 자연의 그것과는 또 다른 형태로 에너지가 상당했다. 이 호응과 설렘 가득한 만남으로부터 꽤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우리들의 현재를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조금은 짐작해볼 수 있다. 

 

작가 김보희

한국화가 김보희(1952~)는 일상과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자기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이다. 지난 40여 년간, 수많은 개인전과 단체전 활동을 통해 화단에서 찾는 작가, 동시에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작가임을 증명해왔으며, 초기 작업부터 일관되게 펼쳐온 자연, 생명, 일상이라는 주제로 인해 이 시대에 더욱 주목받는 작가이기도 하다.

일찍이 그림에 대한 소질을 보였던 그는 중학교 때부터 그림을 배웠고, 선생님의 영향 등 동양화를 가까이할 수 있었던 여건 속에서 자연스레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게 된다. 지금은 채색 풍경으로 압축되었지만 초기에는 인물과 정물, 수묵화까지 아우르며 일상의 다양한 대상들을 그려왔다. 빛이 내려 더 아름답게 보였다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인, 여행지였던 양수리, 공간의 색이 인상적이었던 카페, 휴식을 취하던 테이블 공간 등 그가 그렸던 일상의 대상들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 자신이 눈을 준 것들이었다.

“너무 예쁜 것을 그리기보다 적당히 못생긴 것을 그리는 것을 선호해요.”

자신의 작업에 대해 마음을 흔드는 대상들을 만나왔던 것임을 말하는 김보희는 자연과 일상의 다채로운 모양새뿐 아니라 시시각각 변해가는 표정, 작은 존재에 내재된 거대한 가능성처럼 시각적 아름다움의 차원을 넘어선 것들을 그림에 담아낸다. 채색작업에 대해서는 색을 좋아하고 장지에 먹 대신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단순히 색에 대한 이끌림으로 서술한다. 하지만 자신이 애착을 느꼈던 일상의 표현을 위해, 사랑의 감정으로 세상을 채색하기 위해 색의 사용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1980년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의 첫 개인전 이후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작품활동은 올해로 42년째가 된다. 작품활동과 이화여대에서의 교직생활을 겸한 것은 약 24년 정도(1993~2017) 되는데, 이 시기에 제작한 작품은 2년여의 기간이 소요된 대작 <The days>(2011~2014)을 포함해 380여 점에 달한다.

“느끼는 게 있어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과 같이, 가르치는 일과 작품활동은 각각의 영역에 작지 않은 동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사람들이 김보희의 그림에서 치유받는다고 말하는 지점처럼, 작가 또한 매 순간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제주의 자연과 집이라는, 자신의 영역에서 더없이 깊은 위안과 쉼의 순간을 취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김보희는 현재 미술관과도 거리가 멀지 않은 서귀포의 한 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여행으로 처음 제주를 만났던 그가 제주도에 입도한 시기가 2003년 무렵이니, 제주의 일상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어느덧 20여 년이 되어가고 있다. 여행객이었을 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제주도의 풍경과 자연이 결국 그를 제주에서의 생활로 이끈 셈이다.

이곳, 제주에서 작가의 시간은 더 많은 일상과의 호응으로 이어진다. 아끼는 정원과 집 근처의 식물원, 산책길에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보여주는 존재들을 만나고, 태양빛을 받아 더없이 온화하고 고요한 제주 바다로부터 깊은 평온함을 느끼며, 해 질 녘의 노을과 뒷모습을 내보이는, 그러나 여전히 굳건한 야자나무를 보며 시간에 대한 상념에 잠긴다. 이를 담아낸 그의 그림은 일상과 여행의 경계를 오가며 세상을, 그리고 자신을 만났던 하루하루의 흔적이다. 자기 주변에 대한 애착 어린 시선이 바탕이 된, 그 자신과 밀착된 이야기로서 동시에 김보희라는 한 개인의 삶의 기록이기도 하다.

 

무탈함에 대하여

햇빛과 물, 바람을 먹고 자라는 식물들, 이것들이 존재하는 고요한 숲과 잔잔한 바다, 이것들이 우릴 해칠 리는 없다. 이 안에서 우리는 안전하다. 김보희의 그림에는 고통과 비애와 같은 것이 없다. 시들어가는 순간도 없다. 생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가장 빛나게, 본연의 색을 발하는 식물들이 있고, 풍족한 태양 빛을 받아 온화한 자태를 보이는 바다와 극적인 사건, 사고가 없는 평온한 일상이 있다. 고군분투해야 하는 생활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씨앗과 야자나무의 열매조차 바라봄의 대상일 뿐이다. 이처럼 김보희의 세계는 생명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으로 압축된다. 이것이 그가 바라보는 세상과 현실에 대한 고유한 해석과 구성이다.

사실 현실의 자연과 일상이 매 순간 그렇게 순하고 곱지만은 않다. 삶과 죽음 사이에 때때로 예상치 못한 위태로움이 찾아오기도 한다. 찬란한 순간보다 그 반대의 순간이 우리 생에 더 많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잘 안다. 그런 우리에게 김보희의 그림은 크고 작은 생명의 현현(顯顯)들이 우리 곁에 늘 있다는 것을, 그 존재를 주시하고 가까이함으로써 마땅히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 풍요로운 자연의 속살을 생생히 보여주며 우리의 일상에서 자연이라는 존재가 빠져 있었음을, 우리가 오랜 기간 그것에 목말라 있었음을 일깨워주면서 말이다.

김보희의 그림은 구상이지만 생과 삶에 대한 어떠한 추상의 세계를 향해 있다. 특히, 작품들 대다수에 달린 추상적 명제-In-Between, Towards, The Days-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그 이미지 너머의 것을 그려보게 한다. 그래서인지 김보희의 그림을 보면 무탈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아름답고 평온한 것들에게 풍파와 고통이 없었을 리 없다. 지금 초록을 생생히 내보이는 나무는 수없이 많은 가뭄과 태풍을 겪었겠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것이고, 찬란하게 빛나는 바다 또한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를 보내고 비로소 이제 평온을 찾은 상태이다. 작은 꽃잎조차 해가 나든 비바람이 불든 붉은빛, 분홍빛의 고운 빛을 내며 주어진 자신의 생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일상과 이상이 혼재된 이 평온한 이미지로부터 우리는 눈을 뗄 수가 없다. 표면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내재된 무탈함의 이미지가 삶 속에서 크고 작은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결핍과 고독을 위로해 오는 것이다. 환멸과 열망이 바쁘게 오가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 삶임을 증명하듯이, 무탈함의 아우라가 존재하는 김보희의 그림은 거창하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의 지친 마음을 치유해준다. 또한, 어떠한 곁가지의 소음도 없는 이 평화롭고 고요한 상태에서 우리는 그동안 갈망해왔던 이상적 상을 만난 것만 같은 해갈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온전하며 찬란함이 있는 김보희의 그림에 대한 이끌림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본능적으로 욕망하는 인간의 본질과 마주하는 것과 같다. 일상 속 수많은 것으로부터 소진되고, 자연에게조차도 소외되어버린 우리가 가장 진실한 삶의 동기를 되찾는 순간이기도 하다.

 

전시구성

이번 전시 《김보희-the Days》는 김보희의 대표적인 자연과 풍경 연작, 그리고 제주에서의 일상을 그려볼 수 있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제주 바다와 정원, 꽃과 나무, 열매와 씨앗, 다양한 동식물, 집 주변의 산책길, 중문 거리와 같은 소재들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좋아하는 것에 눈 맞춤 하고 밀착하며 자신의 시간을 꾸려가는 작가의 일상과 관계된 것이다. 일상과의 교감을 김보희 작품세계의 시작으로 볼 수 있듯이, 이번 전시는 작가의 시선을 중심으로 공간별 다섯 구성으로 나누어 그의 작품을 만나본다.

첫 번째 공간은 ‘제주를 만나다’이다. 2003년 제주로 이주해 온 김보희 작가는 이미 그 이전부터 틈틈이 제주를 만나왔다. 여행길에서 만난 푸르른 바다와 숲길, 야자나무와 같이 제주만의 생명력 가득한 풍경은 작가를 이곳, 제주로 이끌었다. 돌바다와 돌담, 거대한 숲과 같은 제주 특유의 풍경들과 탱글한 열매를 맺은 나무는 그 자체로 거대한 생명이다. 제주에 정착하고 나서부터 유독 초록색 그림을 많이 그리게 됐다는 작가의 말처럼, 사시사철 초록인 제주의 자연은 여전히 작가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대상이다. 풍경과 장면, 때로는 개체로서 그려진 제주 자연의 싱그러움과 아름다움은 작가의 따뜻한 시선에 의한 것으로서,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기쁨이다.

두 번째 공간인 ‘생(生)의 에너지를 느끼다’에서는 실제와 상상이 뒤섞인 매혹적인 씨앗 이미지를 선보인다. 김보희는 아주 작은 보통의 씨앗에게서 그것에 내재된 거대한 생명의 힘을 본다. 꿈틀대는 털과 강렬한 색채로 농익어가는 씨앗들은 온전한 열매 못지않은 강렬한 존재감과 위엄을, 아주 작은 생명에게도 그만의 고유하고 거룩한 세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표면의 작은 수많은 점들은 곧 잎을 틔우고 줄기가 빳빳하게 솟을 생명의 존재를 품고 있다. 응축된 것은 곧 터지고 퍼져, 자그마한 이 야생의 씨앗에서 이제 곧 수많은 생(生)들이 생겨날 것이다. 억압이 있을 자리는 없다. 태양과 물과 바람이 기꺼이 허용한, 각자의 특별한 생명을 퍼트릴 무한한 자유가 있을 뿐이다.

세 번째 공간 ‘정원에 머물다’에서는 작가의 사적인 공간과 시간을 그려볼 수 있다. 사람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안전하고 안락한 곳이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이 공간은 작가가 사랑하는 존재들로 가꾸어진 집, 그림의 영감을 얻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사적 공간에서 만났을 대상들로 가득하다. 초록과 붉은 잎은 한 덩어리 안에서 공존하고, 작가와 늘 함께 하는 반려견 레오와 개구리는 마치 대화하듯 마주 보며 서로에게 곁을 준다. 나무를 타고 내려오는 작은 도마뱀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듯, 자기 속도로 그저 슬슬 움직일 뿐이다. 다양한 존재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 작가는 일종의 이상향으로서 자신이 머무는 정원을 형상화한다.

네 번째 공간인 ‘산책을 나서다’에서는 작가의 산책길을 따라 나서 본다. 아스라이 저물어 가는 저녁이 되면 빛을 밝히는 고깃배가 뜨고, 황혼을 뒤로하고 굳건히 서 있는 야자나무가 보인다. 집 근처의 삼나무 오솔길은 유독 어둑해진 이 시간에 자신의 품을 기꺼이 내어주는 듯하다. 저무는 시간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귀하며 당당하다. 자연처럼 수명을 다해 이제는 사라진 카페 풍경이 못내 아쉽고, 중문 산책길의 밤 풍경이 정겹다. 노을 진 산책길에서 바라본 ‘우선멈춤’과 같은 도로의 표지들은 분주함 속에서도 우리 삶의 안전함을 위해서 주시해야 하는 것들을 환기시킨다.

마지막 공간은 ‘시간을 꿈꾸다’이다. 작가는 1년 365일이라는 시간의 속도에 시선을 건넨다. 시간과 함께 열매가 익고 하나의 씨앗이 꽃이 되듯이, 농익은 것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치를 자연 가까이에서 봐왔던 작가에게 인생 후반기인 지금, 시간이 주는 의미는 더없이 깊을 것이다. 자연처럼 인간의 삶에도 시간이라는 규칙이 있다. 과거에 더없이 격렬하고 화려했던 날들은, 이제 은은하고 평온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화면에 두드러진 숫자와 빛의 표현은 지나온 날들을 꿈꾸듯 회상하게 하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일상의 소중함을 전한다.

 

나가며

극도의 생생함이든 아스라이 저물어가는 풍경이든, 그것들은 계속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각기 다른 의미로 빛을 발하고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생의 소중한 순간들을 놓칠 수 없다. 한정된 시간을 가꾸고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죽음을 향한 노화와 병듦이 모두 상실이라면, 우리는 이미 상실의 흐름에 발을 담갔다. 할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있는 것에도 이미 지나온 시간만큼의 한계가 생겨나고 있다. 지금도 매시간 우리는 젊음, 그리고 건강한 삶과 이별 중인 것이다. 김보희의 그림은 그런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행복해지라고. 수많은 이유로 허기지고, 서글프고, 힘이 빠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만큼 걷고 산책하며 초록과 푸르름을 보고 기쁨을 느끼라고. 그리고 충분히 행복해지라고 말이다.

《김보희-the Days》전은 삶의 고됨에조차 무뎌진 우리에게 자연과 생명, 그것들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이 있는 보통의 일상이란 귀한 것임을 명료히 보여준다. 그래서 이 전시는 제목 ‘the Days’가 뜻하는 바와 같이 어떤 존재들의 특별한 시간, 우리가 존재하는 한 우리 각자에게 의미 있는 나날들을 기쁘게 대면하는 자리이다. 살아있고, 살아남은 우리가 위로받으며 삶에의 의욕을 되찾는 자리이기도 하다. 김보희의 시선처럼 각자의 일상을 무관심으로 봉인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사적인 시간과 하루하루의 나날들은 특별함으로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