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10.28 ~ 11.13 Gallery 63 오광수 <전체로서의 자연과 부분으로서의 자연-김보희의 근작>
전체로서의 자연과 부분으로서의 자연-김보희의 근작 _오광수
자연을 보는 동양과 서양의 시각차는 궁극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문화의 차이에서 연유되는 것일 것이다. 비교적 동양문화권에서는 자연이 예술의 중심적인 주제로서 다루어져 온 방면, 서양문화권에서는 인간을 중식으로 한 상대적인 거리에서 자연이 다루어져 왔고, 그래서 동양이 일찍이 자연과 더불은 삶을 영위해온 점에 비해 서양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대상으로 인색해왔다. 이는 바꾸어 이야기한다면 동양의 자연적 소재가 훨씬 관조적이고 귀의적인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반영해주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동양화에서도 이 같은 자연관은 회화사상이 근간이 되어 작용하는 것 같다. 비록 형식상에서의 심한 변모가 기록되고 있긴 하나 바탕에 잠재된 가치관은 아직도 그 뿌리가 깊음을 확인하게 한다. 김보희의 작품도 먼저 이 같은 시각에서 접근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가 줄곧 다루어 오고 있는 소재적 범주와 방법적 기호는 자연과 생활 주변, 그리고 채색에 의한 리얼리즘적 추구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자연과 생활주변의 비례는 반반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근작으로 올수록 자연을 소재로 한 내용이 급증되고 있는 인상이다. 이 두 개의 소재적 범주는 흥미롭게도 밖의 세계와 안의 세계란 상반된 영역을 지니고 있다. 들녘의 풍경이나 해안, 또는 숲의 풍경은 밖의 세계, 열려진 풍경이다. 여기서 열려진 풍경이란 안의 풍경과 상대적으로 바깥이란 단순한 의미보다, 보다 열려진 자연이란 수식에 상응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즐겨 다루고 있는 밖의 자연은 무한대로 열려 펼쳐지는 시각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다른 화가들의 풍경과는 퍽 대조적인 그 독자의 시각적 기호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안의 풍경이란 생활의 주변을, 닫혀진 실내공간을 모티브로 한 것을 가리킨다. 여성이기 때문에 취재될 수 있는 생활공간의 정감이 이 계통의 작품에 주조를 이루고 있다.
방법에 있어선 채색을 기조로 하면서도 지나치게 물질감에 집착하기보다 엷게 피워나가는 투명한 설채의 구사가 돋보이는 편이다. 그가 즐겨 선택하고 있는, 넓게 열려진 시각의 풍경과 잔잔하게 피워나가는 설채의 구사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인상을 주고 있다. 자연의 푸근함 속에 빨려 드는 시각적 효과도 이 같은 열려진 거리와 잔잔한 색조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닌가 본다. 그러고 보면, 그가 보여주는 자연은 때때로 싱겁다고 할 정도로 허심한 체온을 지니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림의 소재가 되기에는 너무 비어있다는 느낌을 갖기 쉽다는 것이다. 예컨대 바닷가 모래사장에 밀려드는 파도와 그것들이 지나간 바닥의 자국은 선뜻 소재로서 취재되기엔 막연하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똑 같은 경우로 끝없이 펼쳐지는 들녘의 잡초밭이나 들꽃들로 가득히 채워지는 화면도 일반적으로 기피되는 내용들이다. 어떻게 보면, 이 점이야말로 이 작가 특유의 시각이자 자연관이 아닌가 본다. 끝없이 펼쳐지는 들녘의 풍경이나 바닷가 파도의 흔적을 들여다보고 있으며 전체로서의 풍경이자 동시에 부분으로서의 풍경이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넓게 열려지는 자연은 전체로서 다가오는 것이지만, 들풀들의 어우러진 모양새나 그 곳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들녘의 길은 부분으로서의 미세함을 포착해주고 있는 것이다. 깜깜한 숲 속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시각은 전체로서 가능하지만 그 속에 숨쉬는 별들의 미세한 자리들은 부분으로서 파악되는 정경이다. 이 독특한 시각은, 전체에서 부분을 보고, 또 역으로 부분에서 전체를 보려는 데에서 비로서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방법적이니 요인들이 현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정신 속에는 오랜 문화적 전통이 깊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의 근작들이 보여주는 독특한 자연해석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 전시를 계기로 그러한 확신이 더욱 다져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