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5 ~ 07.12 [박현주 아트클럽]영국에 호크니 있다면 한국엔 김보희 있다

김보희, The Terrace, 2019, Color on canvas, 324x520cm (8 pieces, 162x130cm each). 사진=금호미술관 제공. 2020.5.15. photo@newsis.com

김보희, Being Together, 2019, Color on canvas, 130x162cm. 사진=금호미술관 제공. 2020.5.15. photo@newsis.com

김보희, Self Portrait, 2019, Color on canvas, 162x130cm. 2020.5.15. photo@newsis.com

김보희, Towards, 2017, Color on canvas, 88x121cm. 2020.5.15. photo@newsis.com

김보희 초대전 금호미술관 3층 전시장.2020.5.15. photo@newsis.com

김보희 기획초대전 <Towards>
일시 2020-05-15 ~ 2020-07-12
장소 금호미술관

 “잘 훈련된 손(Hand), 사물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각(Eye), 그리고 이를 지치지 않고 만들어 나가는 열정(Heart)의 세 가지가 화가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세계 미술시장에서 생존작가중 가장 비싼 작가인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83)의 말이다. 2018년 '예술가의 초상'(1974)이 1019억원에 낙찰되면서 더 유명세를 탄 그는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어 한국에서도 대박을 터트렸다.

젊은 시절 미국 LA로 건너가 팝아트의 선두주자로 활약하던 그는 노년에 '다시, 그림'에 몰두했다. 영국으로 돌아와 자신이 살고 있는 시골마을 숲길을 눈에 보이는대로 그려내 주목받았다. 폭 12m, 높이 4.5m로 거대한 풍경화. "광활한 자연의 변화무쌍함을 표현하려니 어쩔수 없었다"고 했다. 덕분에 숲길을 걷는듯한 느낌을 제대로 선사했다.

국내에도 호크니 같은 삶을 사는 화가가 있다. 서울에 살다 2000년대 중반 제주도로 내려가 자연에 둘러싸여 사는 한국화가 김보희(68)화백이다.

 3년전 이화여대에서 25년간 재직한 교수직을 정년 퇴임하고 실컷 그림을 그렸다.

◆'잘 훈련된 손'...제주에 살며 전업작가

전업작가로 제주에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좋아서, 재미있어서, 눈이 부셔서 그렸다." 제주도의 풍광은 삶의 터전이자 영감의 원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자연의 법칙을 온 마음으로 느끼며 낮과 밤, 하루 하루를 자연속에서 살아냈다.

 마음을 따라간 그림은 기운생동한다. 초록의 싱그러움과 생명의 환희가 넘친다. "자연의 질서에 느낀 신비로움"을 특유의 반복적 세필과 시간의 결로 담아낸 그림은 햇살보다 눈부시다. 터질 듯 부풀어오른 열매 하나, 씨앗 한 톨은 그 자체가 생명력으로 가득한 하나의 우주다.

◇금호미술관, 김보희 개인전 'Towards'

김 화백은 동양화 매체를 기반으로 구상 풍경 회화의 지평을 넓혀왔다. 사실적으로 치밀하게 묘사한 대상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추상적 배경을 한 화면에 구성한다. 그래서 그림은 사실적인데 환상적이다.

금호미술관이 15일 개막한 김보희 초대전 'Towards'는 40년 화업의 진수를 보여준다. 2019년~2020년에 제작된 신작과 대형 회화가 전시됐다.

1층 전시장에는 김화백이 정원에서 가까이 마주한 대상들을 담은 6점의 회화가 걸렸다. 8개의 캔버스를 연결하여 하나의 장면으로 선보인 'The Terrace'는 서로 다른 시점에서 바라본 테라스 앞의 풍경을 담고 있다. 가로 3m, 세로 5m가 넘는 대형 그림으로 마치 초록숲이 울창한 테라스에 있는 기분이다.

하나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아 보이지만(평원법) 발 밑에 자리 잡은 듯한 테라스는 약간씩 어긋난 바닥의 경계면으로 시점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제시한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동양 산수화의 전통적인 시점 처리 방식에 따랐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숲길에 화판을 놓고 숲길을 그렸듯, 김 화백도 테라스에서 계속 거닐면서 풍경을 바라본 그 시선을 그대로 담아냈다. 감상자도 같은 풍경 안에 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한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원근법이나 카메라의 시점에 대항하여 자신만의 해법을 동양 산수화와 폴 세잔의 다시점에서 찾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김보희 화백은 우리 전통 산수화의 방식을 보정없이 제시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 

◆'사물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각'...자연만물과 함께하는 무위자연

작가는 무위자연의 질서를 따른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 만물을 그 자체로서 인정하고 존중한다. 자연에 대한 경외와 예찬을 강조했던 시기를 지나, 자연의 본질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삶과 죽음, 유와 무 등 상반된 개념을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반된 개념 자체를 자연 그 자체의 본성으로서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화면에 담는다.

금호미술관 지하 1층 바깥 전시장에 전시된 'The Seeds' 시리즈는 아름다운 형태와 무늬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거대하게 부푼 씨앗이 생경하지만 2016년부터 소재로 가져온 씨앗은 자연의 순환 체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씨앗을 실제로 관찰하여 그리거나 상상해서 창조하기도 하는데, 꽃을 피우기 위해 혹은 열매를 맺기 위해 분투하는 씨앗의 강인한 생명력을 담고 싶었어요."

이러한 관조적 태도는 상상력이 더해져 씨앗의 원초성에 오롯이 투영된다. "정해진 법칙에 따라 발아하고 꽃을 피우는 객체가 아닌 자연의 섭리를 만들어가는 주체로서의 생명"이라는 것을.

 씨앗부터 꽃, 그리고 시들어진 꽃잎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은 'Self Portrait' 작품이 보여준다.
 
씨앗에 빠진 것도 자연의 순환을 이해하면서다. "한 생명의 시작을 알리지만 동시에 꽃과 열매가 소멸해야만 얻을 수 있는 씨앗처럼, 자연은 순환의 질서 속에서 생을 유지하기 때문이죠."

김 화백은 "시간의 흐름에 빗겨 나지 못하고 점차 변해가는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이 나와 닮았다"고 했다.

빛 바랜 듯한 배경 위로 꽃의 주기를 정밀하게 그려냈다.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자연의 주기 속에서 우리 삶의 본질을 발견하고 담담히 받아들인 작가의 내면이다.

◆'지치지 않고 만들어 나가는 열정'...2년간 시간 함축한 'The Days'

'생로병사' 육체와 달리 무한 반복을 거듭하며 흐르는 시간과 풍경을 형상화한 작품도 있다. 제주 풍경 위로 숫자가 겹쳐진 'Towards'는 문자를 활용한 작품으로, 전시 타이틀로 쓴 신작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월의 흐름이 달력과 나이의 숫자로 파악된다는 사실에 흥미가 생기더군요."

 나무는 그 나무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부터 줄기, 그리고 지금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나무가 온전히 감내해 온 시간을 함축하고 있다.

결국  "자연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주의 진리를 품고 있는 하나의 매개체"라는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의 지난한 작업으로 이어졌다. 화가로서의 열정은 초록의 푸르름이 압도적인 'The Days'에 녹아있다. 27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여 제작했다.

화면 왼쪽엔 새벽 바다, 오른쪽 상단엔 밤하늘이 있다.  화면 속 꽃과 열매는 현실 세계에서는 하나의 계절에 함께 피어나지 못하는 것들이 한자리에 어우러졌다.  2년에 걸쳐 작업한 이 작품 속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라기보다는 작가가 만든 세계이자 심상의 풍경이다.

"나무와 풀과 꽃들이 뿜어내는 푸르름은 있는 그대로의 살아있음과 생명 있는 것들의 표식이다. 눈부시게 빛나며 생명력을 뽐내는 식물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풍광은 제주의 풍광을 주제로 작가가 써 내려간 한 편의 대서사다"(기혜경 관장)

제주풍광에 매료 자연에 천착한 한국화가 김보희

1974년 이화여대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당시 화단은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조였다. 1980년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제1회 김보희 개인전을 열고 미술계에 데뷔한 그는 '동양화가'로 불렸다.

하지만 그 틀에 갇히지 않았다. 동양화가 추구하는 자연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공감했지만 필요에 따라 서양화의 재료를 적절히 활용했다. 동양화라는 한정된 매체에서 초월하는 풍경화의 새 장르를 열어제쳤다.

수묵과 채색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재료 사용. 원경에서 근경으로 다채롭게 구사되는 화면의 구성은 어느 한쪽 문법에 귀속되지 않는 그만의 독특한 풍경을 완성했다.

1980년대 인물과 정물, 그리고 풍경 등 비교적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었던 김보희는 1990년대부터 자연을 소재로 좀 더 견고하게 작업을 구축해 갔다.

"자연은 문명 이전 생의 원리를 함축하고 있는 대상이자, 인간에게 사색과 관조를 유도하는 하나의 세계"라는 화두에 천착했다.

1970년대 신혼여행으로 온 제주도에 마음을 뺏겨 "언젠가 여기에 작업실을 짓고 그림만 그릴거야"는 말은 씨가 됐다. 2005년부터 거처를 제주도로 옮겼다.

이순(耳順)의 나이를 지나 눈에 들어온 자연은 신비로움과 경이로움 그 자체.보고 또 보고 느낀 자연풍경을 화면에 겹겹이 쌓아 올린다. 엷게 여러 번 올려진 물감은 동양화 특유의 질감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자연 그대로의 형태와 색을 재현하려는 그의 노력이 깃들어 있다.

과감한 색면과 세필의 중첩으로 현대 채색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바다 풍경' 시리즈, 원형의 자연으로서 동식물이 공존하는 하나의 세계를 구현한 'Towards'시리즈는 그렇게 탄생했다.

 원시림같은 초록의 정원숲과 씨앗의 솜털까지 되살린 그림은 보는 순간, '아~'하게 하면서 숨통을 틔운다.

미술비평가 심상용은 "김보희가 상상력으로 그려낸 세계는 '현실을 해독(解毒)해 사색의 삶을 되돌려놓는 정원"이라고 했다.

숲과 숲의 식물들과 정원. 초록의 낙원은 '회복과 치유의 해독된 풍경'이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동화되어 물아일체의 경지로 나아간 김보희 화백의 진심이 전해진다.

일상의 소중함을 더없이 깨닫는 코로나 시대, 끝없는 관심과 관찰로 담아온 그림은 사랑이다. 거대하고 눈부시게 반짝이며 고요와 평안을 주는 작품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존중과 사랑. 삶은 더불어 산다는 것.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려하자." 전시는 7월 12일까지.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승인  2020-05-16 06:00:00수정 2020-05-25 10: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