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풍경들
구상풍경회화의 대가로 꼽히는 김보희는 동서양 회화의 전통 양식을 깊이 분석해 그만의 예술적 세계관을 확고히 세운 작가다. 제주도에 정착한 이후로는 바다와 야자수, 열매처럼 자연이 녹아든 일상의 정경을 그리는 작가는 말한다. “사랑하는 것만 그리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전시장에 긴 줄이 늘어설 만큼 세대를 막론하고 사랑을 받으시죠. 오늘도 전시장에 참 많은 관객이 왔더라고요. 작가님 덕분에 동양화의 새로운 매력을 접한 관객들도 많아요.
동양화, 서양화 그런 구분은 무의미한 듯해요. 나는 그 옛날부터 그저 나를 보여주는 것, 내가 본 것을 보여주는 것 이외엔 할 수가 없었어요. 누군가는 보지 않은 것을, 또 볼 수 없는 것을 색과 추상의 형태로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게 좀처럼 안되더라고. 작업도 똑같아요. 내가 보고 배우고 경험한 것에서 무엇이든 해보는 거지. 조선시대부터 선조들이 무명, 비단에 그림을 그렸으니까 헝겊에 그림을 그릴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캔버스를 써본 거죠. 약간의 차이는 있어요. 기존 캔버스는 서양화 위주로 제작된 터라 밑 작업을 위해 젯소를 두껍게 칠해야 하는데 그리고 나면 동양화 물감이 안 먹어요. 내가 해보니 물감이 아래로 쩍쩍 흐르는 거야. 그래서 뒤집어서 그림을 그렸어요. 뒷면에 그리는 게 할 만은 한데, 여전히 힘들어요.(웃음) 여전히 다른 방법을 고민하며 체득하고 있어요. 소재가 뭐가 중요한가. 이중섭 선생님은 은박지에다도 그림을 그리셨는데 말이죠.
맞아요. 선생님 작품을 볼 때면 되려 그림 안에 담긴 세상, 메시지가 중요하단 생각을 했어요. 언제나 마음에 사랑과 충만한 감정을 주는 것들만 그리시잖아요.
사랑하는 것만 그리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까. 또 분노, 우울을 담아 그림을 그리면 보는 사람에게도 그 감정이 전파되잖아요. 한번은 속상한 마음을 털어내고자 그림을 그려봤는데, 시간이 지나고 볼수록 그 그림이 싫더라고요. 결국 찢어버렸지. 요즘 같이 불안정한 시대일수록 좋은 걸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요? 결국 좋은 게 무엇일까? 금은보화를 그린들 그게 좋을까요? 그냥 그림과 마주하는 순간의 느낌, 감동 그런 거죠. 그래서 순간 내 마음에 감동이 오는 것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는 거예요.
제주의 자연이나 반려견 레오처럼 선생님 마음을 행복하게 것들을 그리시지만 그 과정은 고행에 가깝잖아요. 정신, 체력 모두를 쏟아야 하는 일이니까요.
당연히 힘들죠.(웃음) 결국 나 혼자 보려고 그리는 그림은 아니니까.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옆사람도 느끼게 하려면 그만큼의 노력과 표현이 필요해요. 비슷한 감정이 전달될 때까지 같은 곳을 또 칠하고 또 칠해요. 내가 무언가에 감동받는 순간도 좋지만 그걸 또 나타내고 표현할 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반대로 서울에서 작가님을 행복하게 하는 무언가를 그리고 싶으신 적도 있으셨나요?
있죠. 그 나름대로 제주보다 서울에서 살았던 시간도 길었으니까 장소마다 느껴지는 편안함이 있어요. 광화문에 서면 현대적인 건물들이 보이니까 추상적이고도 기하학적인 모습이 또 그렇게 멋있게 다가와요. 가끔 마음에 들면 사진도 찍어오는데 제주를 그리기에도 시간이 부족해서 그렇지 뭐. 그저 우선권을 제주에게 주었을 뿐이지 나는 그리고 싶은게 참 많아요. 바다도, 산도, 도시도 참 아름다워요.
만약 정물화를 그려본다면요? 왠지 선생님 삶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을 그리실 것 같아요.
그려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기회가 잘 안 닿더라고요. 근래에는 자꾸 밖으로 시선이 가니까. 예전엔 정물화를 많이 그렸어요. 글쎄, 뭐랄까? 나는 정물화를 그리는 것도 남에게 너무 정직하게 내 속을 보이는 것 같아요. 내가 갖고 있던 푸른 병, 좋아하던 난로처럼 너무 구체적이에요. 근데 다들 그런 것 같아. 동양화에서도 책이나 문구처럼 자신이 가진 물건 중에 소중한 것들을 그리잖아요.
맞아요. 구도나 메시지를 위해 사물을 구성하는 서양의 정물화하곤 확연히 다르죠. 선생님 작품에서 또한 색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듯해요. 청색과 초록색에 대한 애정이 특히 그렇죠. 개인적으로는 그 어떤 색이든 투명하지만 깊은 자연의 색이 어려있다고 느꼈어요.
색을 칠할 때 내가 본 것, 그리고 그것이 지닌 본질을 함께 고민해요. 예를 들어 열매를 그린다고 했을 때, 노란색으로 시작하지만 맨 처음의 초록색, 익은 후의 주황색과 붉은색까지 전체적인 변화를 담아내고자 해요. 그건 몇 번을 칠해야 나타나는 것들이에요. 한번 붓질하고 나면 색이 옅게 사라지는데 그걸 계속 얹으면서 발색이 되거든요.
켜켜이 쌓아가는 것이군요. 마치 선생님의 그간 작품세계처럼 느껴져요. 매우 성실하게 또 꾸준히 활동해오셨잖아요.
규칙적이고 꾸준한 것을 좋아해요. 제주에서의 하루 일과도 똑같아요. 일어나서 커피 한잔 마시고 산책 한번 나갔다가 작업실로 향해요. 점심을 먹고 다시 그림을 그리다 보면 하루가 끝나요. 학창시절을 되돌아보면 저보다 좋은 재능을 가진 친구들이 많았어요. 근데 끝내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는 몇 사람 안되더라고요. 그림을 그리는 목적이 분명하고 시시때때로 마음을 먹는 것도 중요해요. 그렇게 해서 꾸준히 그림을 그리는 것, 무엇이든 끝내 꾸준히 해내는 것 그게 결국 힘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힘의 원천 중 하나는 제주겠지요. 그곳의 자연뿐 아니라, 선생님의 집이나 일상도 궁금해요.
2000년대 중반부터 서울과 제주를 오가면서 살았어요. 2017년도에 이화여대 교수직을 정년퇴직하고 완전히 정착했고요. 우리집은 1년에 걸쳐 지었는데 남편이 설계를 주도해 우리가 원하는 바를 모두 투영했어요. 살림집은 간소하게, 작업실은 큰 그림을 많이 그릴 수 있도록 크고 높게 지어달라고 했어요. 3~4m 정도의 층고면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5~5.3m 높이의 작업실을 지어주었죠. 결국 내 생애 가장 큰 작품을 제주 작업실에서 그렸어요. 다시는 못할 것 같아.(웃음) 근데 신혼시절 15평짜리 집에 살 때부터 남편은 항상 내게 큰 방을 줬어요. 내가 그림 그릴 수 있도록 말이야. 덕분에 매번 방 크기에 맞춰 큰 그림을 그려왔던 것 같아요.
그야말로 사랑이네요 선생님.(웃음)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어디세요?
집도, 작업실도 좋은데 집 마당을 나와서 걸으면 내가 쉴 수 있도록 남편이 만들어준 방갈로가 있어요. 이번 신작에서도 그렸는데. 레오 데리고 거기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연못도 한번 보고 집에 돌아오는 게 일상이에요. 그 방갈로가 참 좋아요.
지난 한 달간 전시로 서울에 매주 올라오셨잖아요. 이번 전시가 끝나고 제주에 돌아가시면 무얼 먼저 하시고 싶으세요?
그릴 것이 한가득이라 다시 그림도 그리고 쉬고 그래야지요. 나이 드니까 낮잠을 가끔 자는데, 자고 일어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아 음악도 듣고. 근데 난 음악도 마찬가지야. 국악, 가야금, 첼로.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난 다 좋아요.
그것이 말로 선생님께 가진 세상에 대한 애정 같아요. 구분 짓기보다 그저 사랑하시는 것. 그중에서도 선생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그림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바로 ‘나’ 아닌가 싶어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건 그림밖에 없지 않을까? 젊었을 땐 집도 예쁘게 인테리어하고, 텃밭에 상추도 기르면서 된장, 고추장도 담가 먹고 싶었어요. 근데 그것보다 그림이 언제나 우선이었던 것 같아요. 그게 지금까지 오게 한 것 같아요. 결국 그림은 내가 가진 욕구 그 자체였겠지요.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 말이에요.
글 유승현 사진 심윤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