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3 ~ 07.23 따스한 시선으로 어루만진 자연 풍경… 그 안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삶의 시간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김보희의 눈 안의 풍경

같은 장면을 보아도 더 아름답게 감각하는 사람이 있다. 여행을 떠난 길, 눈앞 바다에 윤슬이 펼쳐졌을 때 똑같이 카메라를 꺼내어 찍어도 유독 반짝이게 그 빛남을 담아내는 사람.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그 사람의 “눈 안의 풍경”이라고 부른다. 화가 김보희(1952~)의 작품 속에서는 김보희 눈 안의 풍경들이 있다. 전통 한국화를 기반으로 서양화 재료를 수용하여 자기만의 화법을 구축한 작가는 구상 풍경 회화의 대가로 불린다.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30여년간 재직했으며 박물관 관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명예교수다.

김보희는 동양화 전공 선생님을 만나며 그림을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자기도 동양화를 그리게 되었고 채색화에 관심이 갔다. 해방 이후 채색화는 1970년대 천마도 등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일제의 잔재로 여겨졌다. 전통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수묵은 민족적이며 채색은 왜색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팽배했다. 채색화 그리는 것을 선생님은 만류했지만, 그는 채색화 작품을 국전에 출품했고 특선을 받았다. 월전미술상을 받기도 했으며 1986년에는 경인미술관에서 열린 ‘채묵의 가능성’ 전시에서 대표 신예 작가로 선정되어 일찍이 주목받았다.

1980년부터 국내외에서 20여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금호미술관(2020), 경기도미술관(2015), 국립현대미술관(2014), 뮤지엄 산(2014), 서울시립미술관(2007), 세종문화회관(2009) 외 유수의 기관 전시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작가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여러 미술 기관의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2020년 금호미술관 개인전 당시에는 30분 이상 줄을 서서 관람하는 모습이 연출되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자연을 붓으로 그리는 일

김보희는 작업 초기인 1970~80년대 동양화의 외연 안에서 다양한 대상을 그렸다. 관조적인 시선으로 주변 인물 또는 정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20대에 양수리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며 자연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풍경 속에는 다양한 색이 있었고 그것을 그리는 일은 전과 다른 생기를 주어 빠져들게 되었다. 1990년대에 제주도로 여행을 가며 그는 자연 그리는 일에 더 즐거움을 느꼈다. 바다가 끝도 없이 넓게 펼쳐진 것이 좋아 그것이 커다랗게 존재하는 화면을 만들었다. 푸른색이 가득 찬 화면 한가운데 그어진 줄은 수평선이 되어 하늘과 바다를 구분했다. 바다 그림을 그릴수록 거기에 자기 삶을 비추어 들여다보는 의미가 생겼다.

작가는 2000년대 들어 제주도 남쪽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제주에는 바다는 물론이고 들판을 비롯해 작업실 테라스에서 보는 정원까지 그림의 소재가 넘쳤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것들을 오래 들여다보며 2010년대 들어서는 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되기도 했다. 바다와 들판을 관망하던 넓은 시선과 더불어 그 안의 개별 존재를 살피는 세심한 눈을 가지게 된 것이다. 자연에 대한 경외를 강조하던 작품은 자연의 본질을 들여다보며 씨앗과 열매, 식물의 부분 등을 다루게 되었다. 씨앗 한 톨을 세로 160㎝, 가로 130㎝의 화면에 터질 듯 가득 채워 그려서 선보였다. 통통한 씨앗은 막 터지고 줄기가 나올 것 같은 모습으로 보는 이에게 강력한 생명력을 전한다.

최근 그는 다시 자연 풍경과 더불어 일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국적인 숲을 그린 ‘The Days’(2011-2014), 작업실 정원 풍경을 담아낸 ‘The Terrace’(2019), 중문의 사계절을 담은 ‘중문’ 시리즈 등을 발표했다. ‘The Terrace’의 경우 다시점의 적용이 인상적인데 그의 새로운 것을 향한 여전한 시도를 알게 한다. 김보희는 동양화를 작업의 기조로 삼는 동시에 그것의 동시대적 확장성을 위해 탐구해왔다. 세필을 사용한 채색 수묵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데 한지가 아닌 캔버스 천 위에 그리는 식이다. 가끔 채색이 끝난 후에는 바니시를 발라 코팅 처리하며 색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도 한다. 동서양 회화의 전통 양식에 관한 작가의 오랜 분석과 체득은 이 결과를 조화롭게 완성한다.

이와 같은 그의 작품 세계를 두고 미술사학자 김미경은 1990년대에 이미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한편 그의 작품을 어떤 장르라고 말해야만 할 것인가. 그것은 중국 남화나 북화 같은 기법적 전통 영역의 한계를 뛰어넘었으며 수묵화나 채색화, 동양화나 서양화라는 구태의연한 구분을 초월한다. 중요한 것은 작가 정신이 얼마나 발현되는가이며,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폭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가이다.”

긴 시간 줄을 서더라도 관람자들이 그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기다리게 하는 힘은 여기서 올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빛을 내는 듯싶다.

#여름의 바다, 숲, 이내

김보희의 작품은 따듯한 남쪽 제주를 그리기 때문인지 항상 여름 같다. ‘Towards’(2022)는 우리가 여름날 기대하는 바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다. 제주의 바다는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에 따라 그 색이 달라진다. 현무암이 깔린 바다는 짙은 푸른색을 띠고, 모래가 있는 바닥은 에메랄드색을 보여준다. 맑은 하늘과 밝은 해는 바다의 곱고 짙은 에메랄드색을 더 눈에 띄게 한다. 날씨가 좋아 물결이 잔잔하게 이는 장면에서는 고요와 안온 그리고 평온이 전해진다.

‘Towards’(2022)는 제주의 바다에서 고개를 돌리면 볼 수 있는 숲을 그린 작품이다. 화면 속에는 열대 야생의 숲이 가득 그려져 나타난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크며 넓은 잎을 가진 모습은 열대 지방의 모습인 것을 알게 한다. 짙은 녹색의 사용에서 높은 기온에 무더우면서도 숲의 그림자에 서늘한 야생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작가는 이러한 숲 작업을 할 때는 경험에 상상을 더하기도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제주의 자연에 호주, 피지섬 등을 여행하며 본 자연을 혼합하여 새로운 숲을 만드는 것이다. 화면에서 전해지는 이국적이며 환상적인 느낌은 현실과 환상의 만남에서 기인한다.

‘Jungmoon Street 201905’(2019)는 작가가 최근 새롭게 시작한 ‘중문’ 연작 가운데 하나다. 노을이 진 뒤 푸르스름한 기운이 남은 이내의 시간, 자동차가 지나치는 중문의 한 도로를 그린 것이다. 도로를 가운데 두고 길가에 늘어서 야자수 사이 저 멀리 바다와 하늘 그리고 수평선이 있다. 정년 이후 제주에 정착한 그는 반려견 산책을 위해 중문에 자주 나간다. 중문으로 가는 길 차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어느 순간부터 화폭에 들어오기 시작한 이유다. 작가는 이 연작을 두고 한 인터뷰에서 노을 지는 풍경이나 자동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인생에서 스쳐 간 것들을 떠올렸다고 고백한 바 있다.

‘Jungmoon Street 201905’에 그린 중문 한 도로의 모습은 자연을 담은 앞선 두 ‘Towards’ 연작과 다르게 느껴질 법도 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김보희 눈 안의 풍경이 있고 거기서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일찍이 바다의 수평선에 자기를 투영해 본 작가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접어들며 씨앗과 열매, 작은 식물 등을 화면에 담았다. 이제 더 흐르며 그는 노을과 이내의 시간 속에서 지난 삶의 모습을 반추해 본다. 김보희가 그리는 풍경은 삶의 모습과 맞닿아 있는 풍경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의 눈 안의 풍경은 자기만의 것이며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전해 감동을 가져오는 것이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  승인  2022-07-23 16:00:00 수정 2022-07-23 11:5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