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30 ~ 07.01 김보희 작가의 사적인 제주
김보희 개인전 《Toward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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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05-30 ~ 2023-07-01 |
장소 | 갤러리바톤 |
정원의 열대 식물과 집 앞 산책로의 바다가 보여준 충만한 순간을 잊지 않는다.
금호미술관과 제주현대미술관 전시를 통해 작품 세계 전반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Towards»전은 서귀포 스튜디오의 정원 풍경과 반려견의 모습 등 일상 속 따스함이 두드러집니다.
지난 전시 제목이 ‘the Days’였어요. 제주도로 처음 여행 왔던 순간, 집과 스튜디오가 없는 동안 돌아본 제주, 그리고 이주한 경험을 모두 합쳐 제주도에서 지낸 나날을 그렸죠. 이번에도 제주도의 모습만 담았으니 지난 전시와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어요. 반려견인 ‘레오’가 더 늙기 전에 그림으로 많이 남겨두고 싶어서 그린 연작, 커피 마시면서 본 정원처럼 경험하고 보고 느껴서 좋아하는 것들을 그렸더니 온통 내 생활반경과 그 주변 풍경이네요. 50호 크기 한 점 빼고는 이 전시를 위해 새로 그린 것들로 채웠어요.
신작 중에서도 농밀한 노란 달이 뜬 〈Beyond〉 앞에서 발길이 멈춰집니다. 캔버스 안에서 달의 위치나 크기를 부각한 것도 아닌데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졌거든요. 제목 때문일까요? 다음 장을 기대하게 만드는 새로움을 보았습니다.
집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산방산을 지나는데 달이 정말 멋있게 떠있었어요. 붉다고 해야 하나? 달걀 노른자도 흐린 색이 있고 샛노란 색이 있는데 붉을 만치 샛노란 달걀 노른자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막 감격을 해서 이쪽으로 가서도 보고 저쪽으로 가서도 보고 사진도 찍었는데 아무래도 잘 안 담기죠. 머리로 열심히 기억해뒀다가 그렸는데 목격했을 때의 충만함 덕분인지 실제보다 더 커진 것 같아요. 작품에 ‘투워즈’라는 동일한 제목을 꾸준하게 붙여왔어요. 작품마다 사사롭게 따로 제목을 붙이지 않아도 통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그림에는 어쩐지 다른 제목을 붙여야 할 것 같았어요. 재미있게도 이 그림을 제일 마지막에 그렸어요. 아직 정해진 건 없지만 누군가는 다음을 예고하는 신호로 읽을 수도 있겠네요.
전시장을 찾을 때 거리에서부터 커다란 창 너머로 시원한 바다를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무엇을 둘까 고민하셨나요?
작품의 배치는 갤러리 분들과 부단히 상의를 했어요. 어떤 벽면은 바다의 수평선을 맞춰 걸기도 하고 병풍처럼 연결해서 걸기도 했어요. 커다란 창이 있는 쪽은 밤에도 불을 켜둔다기에 바다를 그린 작품을 두었어요.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혹은 걷다가 잠시라도 바다를 보면 좋을 것 같았거든요.
바다와 우뚝 마주한 것 같은 풍경은 김보희 작가님이 보여주는 익숙한 세계이기도 합니다. 올해의 바다는 어떻게 다른가요?
예전에는 섬도 있고 포말이 이는 격렬한 풍경도 그렸는데 점점 고요한 바다를 그리게 돼요. 이제는 수평선에 치중하는데 아스라할 때도 있고 칼로 싹 벤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색도 다 달라서 그걸 표현하려고 애를 써요. 보고 느끼는 걸 그리는 건 같은데 똑같은 바다는 없잖아요. 모두 다 다른 나만의 바다죠.
‘김보희의 색’은 초록과 파랑이라고 하는데요. 작가님은 모든 색을 사랑한다고 하셨어요.
황혼의 노랑과 핑크가 얼마나 예뻐요. 먹은 까망이고 종이는 하양이다. 동양화를 배워서 수묵의 아름다움도 알고요. 알고는 있어도 제주도에 오고 나서는 이제 보이는 색을 즐겨 쓰죠. 시원하고 힘을 얻는 것 같은 생명력이 느껴지잖아요. 특허로 등록하라는 얘기도 들었어요.(웃음) 누가 인터넷 검색창에 내 이름과 색을 입력했을 때 초록이 잔뜩 나오면 빨강도 이만큼 보라도 저만큼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릴 건 많은데 시간이 부족해요. 다른 색이 등장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어요.
동양화의 영역 안에서 현대성을 탐구하는 오랜 과정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으레 이국적인 걸 좋아하잖아요. 저도 서양화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자꾸 동양화 선생님들과 인연이 닿았어요. 환경에 순응하는 성격이라 배움이 주어진 대로 최대한 씹어 먹고 소화시켜 내 걸로 만들려고 했어요. 결과적으로는 동양화를 통해 배운 게 많아요. 그럼에도 동양화와 서양화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데는 이견이 있어요. 같은 회화보다는 평면과 입체로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 동양화도 알고 서양화도 알면 그만큼 더 좋은 게 있을까. 채색에 힘을 주기 위해 종이를 캔버스로 바꿨지만 먹선을 그리고 동양화 물감으로 색을 칠해요. 물이 닿으면 손상될까 최소한의 후처리를 하니 조금 광택이 돌죠. 그래서 더 서양화적인 느낌이 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요. 어디에 속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동양화 안에서 다양한 방법을 찾는 것이 여전히 흥미로울 뿐이죠.
네 점의 연작은 반려견 레오가 잠을 자거나 뒤돌아보는 등 다른 상황을 포착했지만 배경은 엇비슷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이런 연출은 산수 병풍의 전통적인 구도를 떠올리게 하는데요.
동양화에는 경관을 바라보는 세 가지 각도인 고원법, 평원법, 심원법이 있어요. 그래서 끝없이 펼쳐진 광경을 한 화면에 담을 수가 있어요. 처음에는 네 개의 상황을 커다란 캔버스 하나에 전부 그릴까 했다가 완전히 연결되지는 않도록 쪽을 나눠서 그려본 거죠. 혹자는 호크니를 떠올리게 한다는데 쪽을 나누는 건 그가 그리기 훨씬 전부터 있었어요.(웃음)
종종 등장한 검은 개의 모습을 봐왔기에 반려견 레오는 모델로 익숙하며 함께 삶을 살아가는 한 개체로 보여집니다. 많은 작가가 반려동물을 묘사하고 사진으로 남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하죠. 작가님에게 레오를 작품으로 남기는 건 어떤 일인가요?
이렇게 서울에 올라와 있는 동안에도 레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림 속에 행복한 모습을 많이 남겨주고 싶고요. 제법 사람처럼 포즈를 취할 줄도 알아요. 까만 개라 그리는 재미도 있어요. 어두운 덩어리처럼 먹선이 잘 안 보이도록 은밀하게 그리는 거죠. 가끔 제 모습 대신 레오를 그리기도 해요.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이 서로 닮을 때가 있거든요.
20년 동안 제주에 살았고 많은 작품들이 이 시기에 완성되었습니다. 이주의 나날을 떨어트려 놓을 수 없는데요.
75년에 결혼해 신혼여행을 제주로 갔어요. 2박 3일 짧게 봤는데도 매혹당했어요. 결혼기념일마다 제주에 가다 마흔 살쯤 됐을 때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집을 지으려는데 땅을 백평, 천평 단위로 파는 거예요. 가진 돈도 많지 않아 고르고 고르다 어느 날 한 귤밭을 봤어요. 길가에서 안쪽으로 좁은 길이 깊숙이 나 있어서 사실 입지적으로 좋은 편은 아니었죠. 그런데도 제 눈에는 그 길에서 소피아 로렌이 뛰어나올 것처럼 보였어요.(웃음) 서울로 출근할 때라 비행기 타느라 하늘에 돈을 뿌리고 다녀도 정이 갔어요. 보고 느끼는 것들이 소중해 작품을 많이 그렸죠. 큰 스튜디오 덕분에 100호짜리 작업을 스물일곱 개나 했고요.
그림 속 정원을 보며 어떤 하루를 보낼까, 그리고 자주 등장하는 빨간 머그컵의 정체는 무얼까 떠올려봤습니다.
사람 사는 건 뭐 뻔하죠. 밥 먹고 정원에서 커피 마시고 레오 산책을 가고요. 정원을 돌보는 일이 만만치 않아 풀을 없애고 돌을 깔고 있어요. 손질 때문에 남편한테 잔소리도 하며 보내요. 커피 마실 때 항상 쓰는 머그컵은 대형 마트에서 삼천원인가 주고 샀어요. 베이지색, 주황색을 사서 가족과 나눠 썼어요. 절대 안 깨져서 지금껏 쓰고 있네요. 머그잔은 일종의 상징인데 제가 있던 자리의 여운 같은 거예요. 김보희가 저기 있었구나.
그림만 그리고 살고 싶어하셨는데 이제 부엌에 어떤 머그컵이 있는지도 알 만큼 대중과 소통하게 되었네요.
가끔 어떤 분들이 집으로 찾아오시기도 해요. 아직 아침도 안 먹고 세수도 안 했다, 죄송하다 전시장에서 뵙자, 돌려 보내요.(웃음) 한 유명 배우가 나이가 든 후 죽은 것처럼 자취를 감춘 일이 있어요. 저는 그렇게는 못해도 되도록 사람이 적은 곳에서 없는 듯 조용히 살고 싶었어요. 교수로 재직하면서 제자들한테 부담 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고요. 스승의 날이다 생일이다 매번 챙기는 게 고맙기도 하지만 내가 멀리 가면 형식적인 왕래도 줄어들까 싶어서. 그런데 갑자기 큰 사랑을 받게 되고 저와 제 작품을 찾는 사람들이 생기니 이제는 포기하고 받아들였어요. 죽을 때까지 열심히 그려야죠.(웃음) 압박감이 들 때는 자연에서 치유받거나 동네 카페 투어를 하면서 새로운 환경의 기운을 받곤 해요.
중문의 풍경을 그린 작품은 작가님에겐 친숙한 풍경이지만 보는 이들에겐 한없이 이국적인 느낌을 선사합니다. 이처럼 보이는 걸 그대로 그리지 않고 기억 속의 이미지를 상상과 덧붙여 재조합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이 작품이 될 수는 없고 선별해야 하는데 꼭 그려야만 하는 것이 내 마음에 훅 들어와 왜일까 생각해도 할 말이 없어요. 내 마음에도 이렇게 꽂히는데 다른 사람들도 분명 공감하지 않을까 생각은 해요. 모사하는 것이 아니니 보여주고 싶은 건 더 크게 키우고 걸리는 것들은 없애버리고. 현실에 있지만 없는 것처럼 내가 좋은 대로 그리고 싶나 봐요.
제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 휴식을 취했던 기억들,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곳이 또 있나요?
‘the Days’는 호주에 다녀온 후에 그렸어요. 피지섬이나 인도네시아도 기억에 남아요. 사람보다 큰 나무나 큰 잎이 무성한 태초의 원시적인 느낌이 나는 곳이 좋아요.
얼마 전 〈평온한 날〉이라는 그림산문집을 내셨어요. 김보희 작가의 ‘the Days’는 ‘평온한 날’로 귀결되는구나 싶었습니다.
여러 제안을 받았는데 고사하다 크고 무겁고 비싼 도록 말고 가볍게 볼만한 책이 나온다면 전시에 못 오는 분들도 편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만들어봤어요. 오래전 그린 그림부터 최근작까지 삶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그림이 백 장쯤 실렸어요. 어릴 때부터 술래잡기도 못할 만큼 쫄리는 걸 싫어했어요. 마음이 편해야 되는 성격이 그림에서도 나오나 봐요.(웃음)
오래도록 많은 것을 그려왔고 앞으로도 그릴 게 너무 많다 하셨어요.
그리고 싶은 게 없어질까 두려워요. 새롭게 보고 감동하는 눈이나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떤 예술가들은 찰나의 영감으로 한 번에 작품을 만들기도 하지만 저는 매일 규칙적으로 조금씩 쌓아가는 타입이에요. 그리고 싶은 걸 두고 곱씹고 또 곱씹어서 그 감정을 잊지 않고 작품을 마칠 때까지 성실하게 그리는. 마지막까지 나에게 진실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리면 언제든 그걸 봐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 믿어요.
- 프리랜스 에디터/ 박의령
사진/ 김연제,갤러리바톤 제공